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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조코/그때오늘-중앙일보

‘남성들의 공간’인 시장에서 여성들이 주인 되다

‘남성들의 공간’인 시장에서 여성들이 주인 되다

 

 

 

1900년께 남대문시장. 행상이 때에 맞춰 모여들었다 흩어지는 곳을 ‘장’이라 하고, 점포가 줄지어 늘어선 곳을 ‘시’라 한다. 시장이란 시와 장이 함께 있는 곳이다. 1897년 옛 선혜청 창고 자리에서 문을 연 남대문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상설시장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었지만, 시장 안에 여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진으로 보는 서울 백년]
 
‘남이 장에 간다니 똥장군 지고 따라간다’라는 옛 속담이 있다. 똥장군 진 사람은 당연히 ‘남자’다. 이 장 저 장 돌아다니는 ‘장돌뱅이’도, 장돌뱅이와 흥정하는 ‘장꾼’도 모두 남자다. 장마당은 본래 ‘남성들의 공간’이었다. 여염집 여자는 큰길에서 장옷으로 얼굴을 가려야 했던 관습도, 집에서 장마당까지 거리가 보통 10리가 넘던 공간적 제약도, 장에 내다 팔 물건이나 장에서 사 올 물건이나 한 지게는 족히 되었던 상품의 무게도, 모두 장마당과 여성 사이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던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머슴도 남편도 장성한 아들도 없는 가난한 과부가 아니고서는 시장 바닥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부잣집 과부는 머슴을 시켜 장을 보게 했고, 가난한 과부 중에도 ‘체면’을 따지는 사람들은 단골 행상들과 거래했다. 모르는 남정네들과 말을 섞는 것은 남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1905년 6월, 후일 헤이그에서 순사(殉死)한 이준의 소실이 안국동 자기 집에 ‘여인상점’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서양식 잡화점이었던 이 집은 곧 장안에서 행세하는 여성들의 ‘관광 명소’가 됐다. ‘황성신문’은 이 상점을 일러 ‘대한에서 부인 상업의 효시(嚆矢)’라 했다. 그러나 인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1918년 ‘매일신보’의 어떤 기자는 부인들에게 직접 장을 보라고 권유하면 분명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기로 어떻게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가게나 장거리에서 고기나 콩나물을 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들딸 혼인도 못 시키게”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이라 썼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점차 여성들도 거리낌 없이 시장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내외하던 풍습이 사라진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슴들이 안주인을 속여 가며 물건 값에서 한두 푼씩 챙기는 일을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경제관념’이 뿌리내렸고, 남자들은 물건 값 흥정하는 데 쓸 시간을 직장에 뺏겼다. 작고 가벼우며 알록달록 화려한 신상품도 갈수록 늘어갔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시장은 아예 ‘여성들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시장에서 생선이나 콩나물을 팔아 자식 대학 보낸 ‘여성’들에 관한 신화가 널리 유포되는 사이에, 시장에서 물건 값 흥정하는 것은 남자 체면을 구기는 일이라는 생각도 함께 퍼졌다.

시장에서 다시 남자들을 흔히 볼 수 있게 된 것은 대형 할인점이 생긴 뒤다. 대량 구매와 자동차 운반은 장보기에서 ‘양성 평등’ 시대를 여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고정된 ‘성 역할’이란 많은 경우 시대가 만드는 허상일 뿐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