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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조코/그때오늘-중앙일보

자주국방 꿈꾼 박정희 … 핵 개발은 아직도 논란 중

자주국방 꿈꾼 박정희 … 핵 개발은 아직도 논란 중

 

박정희 대통령이 1978년 충남 서산에서 미사일 발사실험 장면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국가기록원 제공]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산군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과 존 베시 주한미군 사령관 등이 보는 가운데 NHK-1 제9호 미사일 발사 실험이 있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60년대 말 안보 위기 이후 자주국방을 내세우면서 군수산업 육성에 박차를 가했다. 이를 위해 71년 청와대에 군수산업 진흥을 책임지는 경제 제2 수석비서관실을 신설했다. 오원철 경제 제2 수석비서관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12월에 이미 미사일 개발의 필요성을 지시했다고 한다. 미사일 개발이 보다 본격화된 것은 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한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분단국가였던 한국에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사정거리가 180㎞를 넘지 않고 중량을 500㎏으로 제한한다는 조건하에 미국으로부터 일부 기술이전이 이루어졌다. 미국은 한국 정부의 미사일 개발 상황을 집요하게 감시했다.

그러나 더 논란이 된 것은 당시 한국 정부의 핵 개발 문제였다. 현재까지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미국과 유럽의 신문들은 한국 정부의 핵 개발과 관련된 소식들을 간간이 게재했다. 70년대 말 카터 행정부와 박정희 정부 사이의 갈등은 단지 인권 문제만이 아니라 미사일·핵 개발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미사일과 핵 개발 사업은 90년대에 이르러 한국 국민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자체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년대 핵 개발을 둘러싼 내용을 주제로 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93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지금 북한의 핵 개발과 미사일 발사가 논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은 지난 8월 24일 처음으로 로켓 발사 실험을 했다. 안보는 모든 분야에서의 안정과 발전을 담보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가 된다. 그러나 안보를 위해 개발하는 무기들, 특히 미사일과 핵무기는 그것이 평화적으로만 사용된다는 보장이 없다. 특히 그러한 무기들을 개발한 정부가 민주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할 때 위협은 더 커진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안보와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