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년 전 최첨단 양복 패션 ‘미국 따라 배우기’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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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최초의 미국 시찰단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난생 처음 마주친 문명개화의 신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나는 암흑에서 태어나 광명 속으로 들어가 보았고 이제 다시 암흑으로 되돌아왔다.” 사절을 이끈 민영익이 남긴 소감이다. “기기(機器)의 제조 및 선박·기차·우편·전보 등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급선무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가 가장 중시해야 할 일은 교육이다. 미국의 교육방법을 본떠 인재를 길러 백방으로 대응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니 이를 본받아야만 한다.” 동행했던 홍영식도 미국의 산업과 교육에서 조국의 살길을 찾았다.
그들의 눈에 비친 미국은 더 이상 멸시의 대상인 오랑캐가 아니라 ‘과학과 문명의 화신’이자 따라 배워야 할 ‘유의미한 타자’로 다가섰다. 보빙사 종사관으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롱부츠에 단추 4개짜리 더블브레스트 양복을 사 입고 온 서광범의 모습은 이를 웅변한다. 한복 입은 이는 김옥균이다. 1884년 촬영한 사진이다.
한 세기 전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산업을 키우고 인재를 길러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한 선각들의 방법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이란 외세에 기대고 무력에 호소하는 유혈 쿠데타 갑신정변을 일으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 한 그들은 근대의 문턱에서 실패의 역사를 쓰고 말았다.
그들은 내심 ‘약자를 보호하는 수호천사’로 본 미국의 도움을 기대했었다. 그러나 그때 미국은 이들이 내민 손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인이 엔고를 이용해 제주도를 사들이겠다는 망언을 하고, 망언 제조기로 알려진 정치인이 일본의 총리가 된 오늘날, 그때의 슬픈 역사를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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