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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조코/그때오늘-중앙일보

명성황후 시해는 일제의 국가 범죄였다

명성황후 시해는 일제의 국가 범죄였다

 

명성황후 시해를 지휘한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그러나 그는 이노우에 가오루와 이토 히로부미가 조종한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1895년 10월 7일 새벽 훈련대 해산령이 내려지자 다음 날 미우라 고로(1847~1926) 공사는 10일로 잡혀 있던 거사일을 앞당겼다. “러시아 세력이 도도히 조선 반도에 침입하는 근원은 실로 이 궁정의 한 여인, 민비 한 사람의 일빈일소(一嚬一笑)에서 생겨났다. 무서운 동아의 화근이 배양되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녀는 일본의 세력을 제거하려 하는 일심(一心)에 치달아 장래의 화에는 마음 쓰지 않았다. 동아를 구하고 조선을 구할 수 있는 눈앞의 유일하고 가까운 방법은 민비를 죽이는 데 있었다. 민비를 죽여라! 민비를 죽여라! 이것이 당시 경성에 머무르던 지사들의 절규였다.” 행동대였던 우익 낭인들의 주장처럼 이 참극은 그들의 ‘충정’이 빚은 우발적 사건일까?

1894년 9월 15일 평양성 전투에서 청국군을 물리친 뒤 일본 위정자들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야욕을 굳혔다.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미국의 동의를 얻어 낼 최상급의 외교가 필요했으며, 이를 자임한 이가 메이지유신의 주역 중 한 사람인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내무대신 자리를 내놓고 조선공사가 되길 마다하지 않았던 그는 이듬해 4월 23일 삼국 간섭으로 자신의 야망이 산산조각 날 위기에 몰리자 애가 달았다. 고종과 왕후가 러시아를 등에 업고 일본을 밀어내려 하자 궁지에 몰린 그는 두 해법을 모색했다. 하나는 왕후와 손잡고 이 땅을 러시아와 공동 지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왕후를 없앤 뒤 목표대로 조선을 집어삼키는 것이었다.

그는 7월 21일 본국 정부를 설득해 청국에서 받은 전쟁 배상금에서 300만 엔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약속해 왕실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이는 눈속임이었다. 그때 이미 그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왕후 시해를 공작하고 있었다. 이를 떠맡을 하수인으로 뽑힌 자가 극우 성향의 퇴역군인 미우라였으며, 추천인은 바로 이노우에였다. 미우라가 부임한 지 3일 만인 9월 4일 일본 정부는 기증금 이야기를 없던 일로 돌려 버렸다. 약속을 어겨 일본 세력의 퇴조가 명약관화해지자 그는 우익 낭인들을 동원해 10월 8일 인아거일(引俄拒日) 정책의 구심점인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우리 세력을 유지하고 당초의 목적(조선 보호국화)을 달성하기 위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달 14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에게 보낸 미우라의 보고서는 이 천인공노할 범죄 행각에 국가 차원의 개입이 있었음을 잘 말해 준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