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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조코/그때오늘-중앙일보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청산리 승전을 축하하는 기념사진. 맨 앞에 앉은 이가 김좌진 장군(1889~1930)이다(『사진으로 엮은 독립운동사』, 눈빛). 그가 이끈 대한군정서가 당시 보유한 병력은 1200명, 화력은 소총 1200정, 탄약 24만 발, 권총 150정, 수류탄 780발, 기관총 7정이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 땅의 사람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독립을 갈망했다. 그러나 평화적 시위만으로 일제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가슴 깊이 새긴 이들은 무기를 손에 들었다. 1920년 1월 초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던 안창호가 행한 연설은 이를 웅변한다. “독립운동을 평화적으로 계속하려는 방침을 고쳐 전쟁하려 함이오. 독립전쟁에 반대하는 자는 독립에 반대하는 자요.”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이 펼친 국내 진공작전, 특히 홍범도가 그해 6월에 거둔 봉오동 승첩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 “중국 땅에서 전사한다면 개죽음과 같다. 일시 백두산 지방에 회피, 결빙을 기다려 한 발자국이라도 조선 땅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 의의 있는 희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독립군은 홍범도의 증언처럼 물러서기는커녕 조국을 향해 진군하였다.

1920년 10월 21일 중국 지린(吉林)성 청산리 백두산 기슭 험준한 밀림지대 속 깎아지른 절벽 사이 골짜기로 향하는 오솔길 초입에 펼쳐진 개활지 백운평에 아침이 찾아들 때였다. 산허리와 절벽 위에 숨죽이며 몸을 숨긴 대한군정서 소속 독립군의 총구는 계곡 쪽으로 들어서려는 일본군을 향해 불을 뿜었다. 이날부터 26일까지 1주일 동안 독립군 연합부대는 완루구·어랑촌·고소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맞붙었다.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명은 대소 전투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 1200명’이었다고 보도했다. 청산리 대첩에서 화력과 병력에서 절대적 우세였던 ‘무적 황군’을 상대로 독립군은 어떻게 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오호라, 3일간의 전투에 식량이 다 떨어져 대여섯 개 감자로 고픈 배를 겨우 채우고,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능히 150여 리의 험산 밀림을 통행하되 터럭 하나만큼도 기운을 잃지 않았으며, 전투 후에도 수천백 리 삼림과 눈밭을 지나며 동상을 입은 사람이 적지 않되 조금도 원망과 후회가 없었음은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독립신문’, 1921년 2월 25일). 지형과 지세를 잘 이용한 뛰어난 전술과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군 한 명 한 명이 품고 있던 불굴의 결사항전 의지가 다시 돌아온 제국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고동치게 한다. 우리 역사에 도돌이표는 없어야 한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