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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조코/그때오늘-중앙일보

을사늑약을 목놓아 호곡한 장지연과 친일논란

을사늑약을 목놓아 호곡한 장지연과 친일논란

 

1905년 을사늑약 사흘 뒤 ‘오늘 목 놓아 큰소리로 곡한다’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황성신문에 실어 국권을 앗긴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000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시일야방성대곡’에서 장지연(張志淵)은 나라를 판 매국노 을사오적뿐만 아니라 늑약에 끝까지 저항했던 한규설에게도 병자호란 때 항복문서를 찢으며 통곡한 김상헌(金尙憲)과 할복했던 정온(鄭蘊)처럼 강하게 맞서지 못했다며 힐난의 창끝을 겨눴다. “지난번 이토(伊藤) 후작이 왔을 때 우매한 우리 인민들은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안녕(鼎足安寧)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이인지라. 이번 내한도 우리의 독립을 굳게 할 방책을 권하기 위한 것이리라’하여 관민상하가 환영해 마지않았다. 세상일이란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5조약을 무슨 까닭에 그가 제출했는지 천만뜻밖이구나. 이 조약은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이토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는 연대의 약속을 깬 이토도 비난하였다.

그는 황제와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러·일의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이 주창한 인종주의적 아시아 연대론에 희망을 품은 이 땅의 지식인 중 하나였다. 그에게 일본은 백인종과의 대결에서 황인종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공조해야 할 대상이자 그 지도까지도 감수해야 할 대상이었다.

“우승열패와 강신약굴(强伸弱屈)의 현상은 우리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바이다.” 을사늑약 이후 그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서구열강이 만든 약육강식의 세상은 분열과 경쟁만이 있는 소강세(小康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동양은 문자 창조 이래로 문명의 발달이 최고라 5000여 년 사이에 개화진보가 극에 달했다. 정치의 술책은 상공업만으로 부강의 근본을 삼기는 어렵다. 윤리도덕과 문학법률이 문명의 기초다.” 1909년 박은식과 함께 대동교를 창건한 그는 구국의 길을 유교의 개신과 확장을 통한 종교개혁에서 찾았다. 국망에 즈음해 “국가는 주인이요, 동양주의는 손님”이라며 충성의 대상을 황제에서 민족으로 바꾼 신채호도 1920년대까지 자신이 “유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1921년 숨을 거둘 때까지 유교의 이상향인 ‘대동세(大同世)’의 실현을 꿈꾸며 유교 전통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잃지 않았던 그를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기 어려운 이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