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을 목놓아 호곡한 장지연과 친일논란
1905년 을사늑약 사흘 뒤 ‘오늘 목 놓아 큰소리로 곡한다’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황성신문에 실어 국권을 앗긴 슬픔을 토로한 장지연.[국사편찬위원회 소장] | |
| |
그는 황제와 백성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때 그의 머릿속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는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싼 러·일의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일본이 주창한 인종주의적 아시아 연대론에 희망을 품은 이 땅의 지식인 중 하나였다. 그에게 일본은 백인종과의 대결에서 황인종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공조해야 할 대상이자 그 지도까지도 감수해야 할 대상이었다.
“우승열패와 강신약굴(强伸弱屈)의 현상은 우리들이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바이다.” 을사늑약 이후 그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 서구열강이 만든 약육강식의 세상은 분열과 경쟁만이 있는 소강세(小康世)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동양은 문자 창조 이래로 문명의 발달이 최고라 5000여 년 사이에 개화진보가 극에 달했다. 정치의 술책은 상공업만으로 부강의 근본을 삼기는 어렵다. 윤리도덕과 문학법률이 문명의 기초다.” 1909년 박은식과 함께 대동교를 창건한 그는 구국의 길을 유교의 개신과 확장을 통한 종교개혁에서 찾았다. 국망에 즈음해 “국가는 주인이요, 동양주의는 손님”이라며 충성의 대상을 황제에서 민족으로 바꾼 신채호도 1920년대까지 자신이 “유생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1921년 숨을 거둘 때까지 유교의 이상향인 ‘대동세(大同世)’의 실현을 꿈꾸며 유교 전통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잃지 않았던 그를 민족의 이름으로 심판하기 어려운 이유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알면조코 > 그때오늘-중앙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성들의 공간’인 시장에서 여성들이 주인 되다 (0) | 2010.10.04 |
---|---|
청산리 대첩 빛나는 승리 (0) | 2009.10.21 |
고종 ‘대한제국’ 선포 … 문화선진국 의지 국호에 담다 (0) | 2009.10.15 |
명성황후 시해는 일제의 국가 범죄였다 (0) | 2009.10.15 |
자주국방 꿈꾼 박정희 … 핵 개발은 아직도 논란 중 (0) | 2009.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