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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골프 이것저것

욕설 담긴 ‘방송국 시리즈’서 점잖은 한자성어로 격상

진화하는 골프 은어, 그 풍자의 사회심리학

 

‘스노우맨/계백장군/버탐필보/금일재현불가타/소타이낭/DPGA/전파만파/피아노맨….’
최근 필드에서 회자되고 있는 골프 은어(隱語)다. 골프 은어는 골퍼끼리 또는 골퍼와 캐디(경기보조원)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풍자적 성향의 ‘유희어’가 대부분이다. 국립국어원 정희창 연구원은 “은어는 집단성 또는 동료의식을 바탕으로 생성되고 소비돼 왔다. 골프 은어는 ‘골퍼들의 자화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골프 은어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첫째는 골프게임의 본질을 관통하는 내용이고, 둘째는 골퍼 사이의 갈등 요소를 완화시키거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은어, 셋째는 캐디가 골퍼의 샷과 행동을 빗대서 표현하는 것이다.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은어의 속성에 따라 골프 은어도 진화하고 있다.
 
샷과 관련된 한자성어 홍수
골프 은어는 1~2년 전만 해도 ‘C8’로 끝나는 영문 약자가 많았다. MBC(마크하고 비켜 ~)와 KBS(깃대 뽑고 비켜 ~), SBS(~ 비켜 ~)는 퍼팅 때 ‘노 기브(No give)’의 의사표현으로 사용됐다. “오케이를 줄 수 없다”고 야박하게 말하기가 쉽지 않을 때 이런 은어들이 오고갔다. 이후 ‘YTN(인마 턱도 없다)’에 이어 ‘오바마(오케이 바라지 말고 마크해)’가 유행했다. 표현이 점점 순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충남대 국문과 이선웅 교수는 “욕설이나 거친 말을 영문 약자로 바꿔 쓰는 일은 매우 흔하다”며 “거친 의도는 그대로이나 말을 순화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한 순화의 흐름 속에 지난해 유행한 게 샷과 관련한 한자성어였다. 금상첨화(폼도 좋고 스코어도 좋은 골퍼), 유명무실(폼은 좋은데 스코어가 나쁜 골퍼), 천만다행(폼은 안 좋은데 스코어가 좋은 골퍼), 설상가상(폼도 스코어도 안 좋은 골퍼) 등이다. 골퍼들이 만들어 낸 사자성어로는 다타이신(多打利身·공을 많이 치면 몸에 이롭고), 소타이심(少打利心·타수를 적게 치면 마음에 이롭고), 소타이낭(少打利囊·또한 적게 치면 주머니 사정이 좋아진다)이 있었다.

계백장군(계속해서 백 개 이상만 치는 골퍼)은 캐디들이 초보골퍼를 빗대 표현한 아가씨(아직도 가라스윙 하나)에 비하면 품격이 상당히 높아진 것이다. 버탐필보(버디를 탐내면 필히 보기를 한다)나 금일재현불가타(今日再現不可打·오늘 다시는 칠 수 없을 만큼 잘 친 공)에서는 골퍼의 교양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이선웅 교수는 “한자성어의 은어는 사회 다른 분야에서도 드물지 않게 목격된다. 골프장에서 생성되는 한자성어는 골프를 즐기는 중산층의 품격을 가장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파워와 권위·결속의 뜻 담겨
골퍼들이 이처럼 은어를 만들어내는 심리는 뭘까. 동의대 레저스포츠학과 김찬룡 교수는 “자기과시성과 사교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다섯 시간 가까이 라운드하면서 자신을 상대방과 차별화하려는 과시욕과 함께 사교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게 은어로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이선웅 교수는 이를 “‘파워(power)’와 ‘권위(prestige)’의 상징물”이라고 규정했다. 체육과학연구원 김용승 박사(스포츠심리학)는 여기에 ‘공동체의 결속(community solidarity)’이라는 요소를 더했다. 이 얘기를 종합하면 골프 은어는 ‘파워, 권위, 결속’이라는 심리상태에 의해 생산되고 있다.

일파만파(첫 홀에 한 명이 파면 모두 파)에서 진화한 전파만파(첫 홀에 전국에 한 명이라도 파면 모두 파)가 대표적인 예다. 첫 홀에서 일파만파·전파만파를 빌미로 ‘파(par) 세이브’를 한 것처럼 구제하는 것은 누군가의 파워를 통해 동반자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한 배려란 얘기다. 동시에 같은 집단의 유대감을 높이기 위한 ‘결속’에 해당한다고 한다.

비아그라 샷(하늘로 높이 뜨는 샷)과 룸살롱(한번 빠지면 헤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로 깊은 벙커나 숲에 빠진 볼) 등도 그들의 우월한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차용된 은어로 볼 수 있다. TV 샷(TV에 나오는 프로처럼 잘 친 공), 미잘공(미치도록 잘 맞은 공), 주사파(주 4회 라운드하는 골퍼) 등의 줄임말에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숨어 있다.

‘골퍼의 3대 쾌감’은 ‘라운드 끝나고 들어가는데 비가 오기 시작할 때/골프장 오갈 때 내 차로는 차가 잘 빠지는데 반대편 차로가 꽉 막혀 있을 때/돌아올 때 신호대기하면서 주머니에서 딴 돈 꺼내 헤아릴 때’라고 한다. 김찬룡 교수는 “골퍼 자신의 우월성이나 승자의 자기과시성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얄미운 동반자 일컫는 ‘~者 시리즈’
강자가 있으면 약자도 있다. 골프장의 약자는 캐디다. 이들은 손님이라는 우월적 지위에 대항할 수 없는 신분이다. 그래서일까. 캐디들에게 비친 골퍼의 모습은 썩 아름답지 않다. K골프장의 김선희 캐디캡틴은 “서로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은어가 생겨나는 것 같다”며 “유쾌하고 기발한 얘기도 있지만 기분이 상하는 표현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캐디가 골퍼를 바라보는 눈은 풍자적이다. 아니 빈정거림이 숨어 있다. 스노우맨(양파(더블파)를 밥 먹듯이 하는 골퍼)과 피아노맨(애인과 애정 행각을 벌이는 골퍼)이 대표적이다. DPGA(동네프로골프협회)는 골퍼들의 내기문화를 꼬집는 표현이다. 실력은 동네 수준인데 게임 방식은 남들 하는 것 다 따라한다는 비아냥이다.

골퍼 입장에서 얄미운 동반자를 일컫는 ‘자(者) 시리즈’도 있다.
‘비거리 줄었다고 투덜대면서 제일 멀리 보내는 자, 매일 공 치는데도 회사 잘 돌아가는 자, 새벽 공 치러 나오면서 마누라한테 아침밥 얻어먹고 왔다고 자랑하는 자….’
골프 은어의 순기능도 있다. 김용승 박사는 “경쟁의식이 작동하는 골프 게임 중에 은어를 잘 사용하면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완화시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적절한 상황에서 주고받는 적당한 수위의 은어는 라운드를 즐겁고 풍성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창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