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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를 위하여` 김추기경의 유산

`모든 이를 위하여` 김추기경의 유산

낮은 곳을 향한 삶 실천한 진정한 신앙인

 

세상의 모든 허물을 사랑으로 덮었던 김수환 추기경의 마음을 보여주듯 영원한 작별의 장례미사를 앞둔 20일 새벽 흰눈이 내려 세상을 덮었다.

평생 자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이에게 나눴던 김 추기경의 사랑처럼 그 눈이 녹아 대지에 젖어들면 새봄을 재촉하는 생명수가 되어 세상을 푸르고 밝은 색으로 채색할 것이다.

고인은 사회 소외층이나 약자에게는 항상 다가가 손을 꼭 잡아주며 위로가 됐다. 불의에는 바른 소리를 하는 용기를 보여줬다.

그러나 겸손했다. 독실한 가톨릭 사제였지만 자신만의 종교를 고집하면서 벽을 만들지도 않았다.

김 추기경의 일생은 그랬다. 그가 가르침을 철저하게 지키고 따른 하느님의 곁으로 이제 떠났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감동했다.

20일 땅에 묻힌 그의 육신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空手去)' 자체였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정신적인 유산은 대조적으로 큰 산과 같았다. 김 추기경의 삶과 죽음에서 감동하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공감대는 이런 점에서 비롯됐다.

우연인지 그가 신도를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정한 사목 표어는 '모든 이를 위하여'였다.

◇소외받는 이들의 벗..'낮은 곳을 향한 삶'

경제 성장이 지상과제이던 1960-1970년대 추기경은 산업화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967년 5월 강화도 심도직물의 노조원 해고 사태 당시 김 추기경의 건의로 천주교 주교회의는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대사회 메시지를 던졌다.

이후에도 동일방직 사건 등 유사한 노동 탄압 사례가 있을 때마다 추기경은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

철거민, 탄광촌, 장애인, 빈민촌 등 사회 소외층의 곁에는 늘 그가 있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는 믿음을 철저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이날 정진석 추기경은 장례미사 강론에서 "김 추기경님의 사목 활동에서 우선 순위를 둔 것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고 소개했다.

◇고비고비 양심의 소리..'민주화의 등불'

인권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김 추기경은 소신 있는 정치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유신 체제가 막 시작된 1971년 그는 전국에 생중계된 미사의 말미에 박정희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 방송이 중단된 적도 있다.

정국이 혼란할 때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담아 용기있는 시국 성명을 발표했고 권력의 폭주에 제동을 걸었다.

1974년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시작으로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는 상황에서도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 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의 용기는 천주교와 정권과의 대립을 키우면서 교회 내부에서조차 정치 개입에 대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추기경의 행보는 계속됐다.

결국 1980년대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했고 6.10 국민운동 때에는 명동성당에 진입한 시위대를 강제 연행하려던 정부에 단호히 맞섰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시대의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민족의 양심이자, 우리의 마음 속에서 빛을 밝히는 등불이었다"고 평가했다.

◇벽을 허문 사회 통합의 리더십

총 38만7천420명에 달한 명동성당 빈소 조문객은 가톨릭 신자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삶과 죽음에서 감동한 국민들은 종교와 이념의 벽을 넘어 그의 선종을 애도했다.

분열과 갈등에 화해의 다리를 놓아주고 화합과 평화를 추구해온 그의 리더십이 죽어서도 힘을 발휘한 때문이다.

실제 조문 행렬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고 신앙의 구별도 없었다.

김 추기경은 평소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늘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고 한다.

최근덕 성균관장은 "참다운 종교인이면서 종교간의 벽을 허물었던 분이다. 다른 종교에 대해 늘 넉넉하게 마음을 열었다. 다종교사회인 한국이 별다른 종교분쟁 없이 지내온 것도 따지고 보면 그분의 덕이 크다"고 말했다.

남의 종교를 인정하는 넉넉한 마음은 모든 국민이 배워야할 귀중한 정신적 자산이라는게 최 관장의 평가다.

◇장기기증..사랑의 힘

고인이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쳤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마지막 사랑의 실천으로 자신의 안구를 기증, 어둠 속에 살아온 사람에게 빛을 선사했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은 이제 사랑의 바이러스처럼 급속하게 퍼져 장기기증 단체에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신청이 쇄도하고 있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가수 장윤정, 서인영, 박정아 등이 각막 또는 조직 기증 의사를 밝히거나 서약까지 마친 상태다.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죽음에 대한 자세 역시 귀감이 되고 있다.

정호승 시인은 "결국 추기경께서는 인간은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제일 중요한 사실을 온몸으로 남겼다. 그를 통해 자기 삶을 뒤돌아보고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진정한 신앙인..가톨릭 교세 확장의 주춧돌

김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30여년간 서울대교구는 눈부시게 교세를 확장해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8배나 넘게 불어났다.

그는 한국 사회 속에 천주교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려 노력하면서 한국 가톨릭의 도약을 이끌었다. 서울대교구장에서 퇴임한 뒤에도 그가 쌓아놓은 훌륭한 신앙인의 이미지는 천주교 교세 확장의 밑바탕이 됐다.

특히 1969년 고인이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추기경으로 서임된 일은 한국 가톨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인 첫 추기경이었고 당시 전세계 추기경 136명 중 최연소였다.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조각가인 최종태 예술원 회원은 "살아 계실 때는 좋은 선배, 훌륭한 추기경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돌아가시고 나니까 테레사 수녀 같은 성자였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