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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아기 … 잊지 않을게' 묘비명 … 22년 만에 약속 지킨 뉴욕 형사대

'희망 아기 … 잊지 않을게' 묘비명 … 22년 만에 약속 지킨 뉴욕 형사대

살해 뒤 박스에 담겨 버려져
신원도 몰랐지만 포기 안 해
범인은 아버지 사촌 남동생

 

1991년 발생한 여아 살인사건에 대한 제보를 요청하는 포스터가 지난 7월 뉴욕의 길거리에 붙어 있다.

22년간 미궁에 빠졌던 이 사건은 지난주 초 결정적인 제보로 해결됐다. 범인은 소녀 아버지의 친척인

것으로 밝혀졌다. 작은 사진은 ‘희망 아기(Baby Hope)’로 알려진 안젤리카 카스틸로의 무덤. 묘비에는

‘여기 잠든 소녀의 신원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며 경찰의 연락처가 새겨져 있다. [AP=뉴시스]

 

찌는 듯한 더위가 맹위를 떨친 1991년 7월 23일 오후 미국 맨해튼 서쪽 하이웨이. 도로 보수 노동자들이 심한 악취가 나는 아이스박스를 열어보곤 혼비백산했다. 썩은 물에 둥둥 뜬 콜라 캔 밑을 훑자 여자아이의 시신이 떠오른 것이다. 성폭행당한 뒤 목 졸려 죽은 시신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 2년 뒤 수사를 맡았던 뉴욕 34지구 형사대는 소녀를 브롱스 공동묘지에 묻었다. 신원도 밝혀지지 않은 소녀에게 형사들은 ‘희망 아기(Baby Hope)’란 이름을 붙여줬다. 형사들이 주머니를 털어 만든 묘비엔 “우리가 잊지 않을게”란 문구와 함께 신고 전화번호를 새겨 넣었다.

 이후 22년 동안 수사관들은 약속을 지켰다. 소녀가 발견된 워싱턴하이츠 일대에 유인물을 뿌리고 탐문수사를 했다. 결정적 제보자에겐 1만2000달러 현상금까지 걸었다. 제리 조지오 형사는 뉴욕경찰에서 은퇴한 뒤 자진해서 영구미제 사건 수사팀에 자원했다. 마침내 지난주 초 결정적 제보가 들어왔다. 아주 오래 전 친구로부터 “여동생이 살해당한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는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의 진술을 토대로 경찰이 찾아낸 사람은 바로 소녀의 언니였다. 피해자의 신원은 안젤리카 카스틸로로 밝혀졌다고 뉴욕타임스(NYT)가 12일(현지시간) 전했다.

 수사는 급진전했다. 멕시코 이민자였던 안젤리카의 부모는 사건 당시 이혼한 상태였다. 아빠는 안젤리카와 언니를 데려갔고 엄마는 막내와 떠났다. 그러나 안젤리카를 돌보기 힘들었던 아빠는 뉴욕시 퀸스에 살았던 사촌 여동생 발비나 라미레즈 집에 딸을 맡겼다.

어느 날 라미레즈의 남동생 콘라도 후아레즈가 누나의 집을 찾았다. 우연히 안젤리카를 본 후아레즈는 욕정을 참지 못했다. 네 살배기 조카를 덮쳤다. 아이가 소리치자 목을 졸랐다. 잠시 후 안젤리카의 숨이 끊어지자 겁에 질린 후아레즈는 누나 라미레즈를 불렀다. 누나는 침착하게 아이스박스를 가져오게 했다.

 남매는 조카의 시신을 차가운 콜라 캔과 함께 아이스박스에 넣었다. 그러곤 택시를 불러 맨해튼으로 간 뒤 아이스박스를 버렸다. 안젤리카의 아빠가 딸을 찾을 때마다 남매는 가출했다고 둘러댔다. 생활고에 멕시코와 미국을 전전했던 아빠는 그러려니 하며 실종 신고도 하지 않았다. 안젤리카는 잊혀졌고 후아레즈는 단 한 번도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22년이 흐르는 동안 시신 유기를 도운 라미레즈도 세상을 떠났다. 11일 모든 사실을 밝혀낸 뉴욕경찰은 후아레즈의 집을 덮쳤다. 영문도 모른 그의 아내는 “남편은 새벽에 일터로 나갔다”고 말했다.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 식당에서 일하고 있던 후아레즈는 이날 경찰에 체포됐다. 수사관들의 추궁에 후아레즈는 모든 걸 체념한 듯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22년 동안 다른 이름으로 잠들어 있던 소녀의 묘비엔 ‘안젤리카 카스틸로’란 이름이 새겨지게 됐다.

뉴욕 경찰은 사건 해결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91년 사건이 발생한 이후 포기하지 않고 매년 7월 시체가 발견된 인근 지역의 집들을 일일이 방문하며 집중적으로 재수사를 해 결국 범인을 검거하게 됐다”며 “드디어 억울하게 숨진 어린 카스틸로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뉴욕=정경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