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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자유공간

“삼성·LG라도 전기료 제값 내라”

“삼성·LG라도 전기료 제값 내라”

 

이명박 대통령이 한전과 전력거래소를 야단쳤다. 정전 대란을 맞아 탁자를 치고 심한 말까지 했다. 2003년 9월 28일 서울 시장 시절 로마에서 끔찍한 블랙아웃(대규모 정전 사태)을 직접 경험한 그의 분노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혼 내는 장면을 지켜보는 국민들도 속 시원한 분위기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얼마 전 물러난 김쌍수 한전 사장은 연봉 20억원의 LG고문을 포기하고 연봉 2억원의 한전으로 옮긴 인물이다. 그는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은 잘못된 전기요금 때문”이라 했다. 전임 지식경제부 장관인 최경환 의원도 똑같은 의견이다.

 전기를 아끼라고 국민을 들볶는 시절은 지났다. 우리 가정들은 20여 년간 피나는 전기 다이어트를 했다. 알뜰한 주부들은 고(高)효율의 가전제품을 찾았고, 주택의 단열효과도 개선됐다. 가정용 에너지 증가율이 연 평균 1.3%에 머물 정도로 허리띠를 졸라맸다. 가정용 전기만큼은 선진국에 버금가는 수준의 높은 효율을 깔끔하게 달성했다. 더 이상 “한 집에 한 등 꺼라” “전기 코드를 뽑으라”며 국민을 쥐어짤 생각일랑 접어야 한다.

 전력 대란의 주범은 따로 있다. 바로 정부와 기업이다. 산업용 전기료가 1㎾h에 87원으로 주택용(130원)보다 훨씬 싸니 대놓고 펑펑 쓴다. 정부는 “수출 많이 하라”며 원가 이하로 대준다. 현실에 안주한 기업들이 전기 효율을 높이는 데 별 관심이 없는 건 당연하다. 우리의 에너지원단위(1000달러어치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에너지)가 일본의 3배를 웃도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산업용 전력 비중은 주는데, 유독 한국만 거꾸로 가고 있다. 일본은 30% 남짓하지만 우리는 54%로 고공비행 중이다.

 전력 소비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공공부문도 흥청대기는 마찬가지다. 누진제 전기요금에 벌벌 떠는 일반 가정들과 달리 지방자치단체의 호화판 유리 청사는 여름엔 에어컨, 겨울엔 전기 라디에이터를 빵빵하게 틀어댄다. 밤에 북한은 깜깜하고 남한은 훤한 인공위성 사진도 불편한 진실을 담고 있다. 뒤집어 보면 그만큼 가로등 같은 공공부문의 전기 낭비가 심하다는 의미다. 그뿐 아니다. 농사용 전기료는 아예 산업용의 절반이다. 한국처럼 비닐하우스에 전기온풍기를 틀어대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정부가 블랙아웃이 겁난다면 이런 곳부터 제대로 손봐야 한다. 고작 14% 남짓한 가정용 전력만 구박할 일이 아니다.

 전기는 열 전달률이 30%에 불과한 고급에너지다. 하지만 물가안정에 신경 쓰는 ‘친절한’ 정부 덕분에 가장 싼 에너지가 됐다. 지난 10년간 등유와 가스 값은 3배 이상 뛰었지만 전기요금은 16%만 올라 가격 역전(逆轉) 현상이 생겨났다. 요즘 전국적으로 가스 보일러를 뜯어내고 전기보일러를 까는 공사가 한창이다. 총선·대선이 있는 내년까지 더 이상 전기료는 못 올린다는 확신이 전기 난방 열풍을 불렀다. 눈치 빠른 소비자들이 정부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번 정전 사태는 전초전에 불과할지 모른다. 전력 수요가 집중되는 최대 시련기인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무조건 물가와 수출기업만 챙기는 개발연대의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할 듯 싶다. 가정용 전기요금으로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시절도 지났다. 다소의 충격을 각오하고 산업용 전기료부터 확 끌어올리는 것 말고는 해법이 안 보인다. 오죽하면 LG 출신인 김쌍수 사장의 입에서 “천문학적 이문을 남기는 삼성·LG에라도 전기료는 제값 받아야 한다”는 쓴소리가 나왔을까. 마지막으로 개인적 소망이 하나 있다. 정보기술(IT)과 접목한 스마트 그리드에 대한 기대감이다. 이번처럼 애꿎은 시민들이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양식장 메기가 떼죽음하는 비극은 보고 싶지 않다. 블랙아웃 위기가 오더라도 한전이 스마트 그리드를 이용해 발전소 건설에 무조건 반대해온 환경원리주의자와 지방자치단체들부터 차례로 전기를 끊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이 수익자 부담 원칙에도 맞고, 정의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