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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이 폭행 둔갑 안 되게 폭력사건 수사관행 바꾼다

선행이 폭행 둔갑 안 되게 폭력사건 수사관행 바꾼다

위법행위 막다 발생 땐 정당
경찰청, 일선서에 새 지침

 

골목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중학생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우리 현실에선 그냥 지나치는 게 낫다. 잘못 끼어들었다간 어린아이들한테 봉변을 당하거나 훈계를 하다 몸싸움이라도 하면 경찰서로 끌려가 폭행범으로 입건되기 때문이다.

경찰청은 청소년을 훈계하거나 위법행위를 막다가 발생한 폭행은 정당행위로 보라는 내용의 ‘폭행사건 수사 관련 업무지시’를 일선서에 내려보냈다고 3일 밝혔다. 고소인이 진단서만 제출하면 상대방을 무조건 폭행 또는 상해 피의자로 입건하는 수사관행이 바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선행을 폭행으로 둔갑시킨 어이없는 경찰’(본지 1월 29일자 10면) 보도의 후속조치다. 지난달 23일 서울 중랑역에서 부정승차를 단속하던 노인들을 밀친 20대 남성을 제지하던 현직 교사 2명이 폭행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찰청은 “경찰 수사가 국민의 눈높이와 상충하지 않도록 위법행위를 저지하거나 청소년의 일탈행위를 훈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행은 정당행위로 판단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일선 경찰은 고소인이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면 경위를 따지지 않고 폭행 혐의로 상대방을 형사입건해 왔다.

 앞으로 경찰은 입건하기 전에 폭행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측으로부터 진단서를 제출받은 뒤 의사에게 상해의 원인을 묻고, 현장 폐쇄회로TV(CCTV)나 증인을 통해 폭행의 인과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경찰청은 고소인의 민원 제기나 과잉행위 발생 가능성에 대한 일선서의 우려와 관련해 정당행위의 구체적 세부 기준을 만들기로 했다.

 중랑역 사건이 보도되자 네이버 등 인터넷 포털사이트에는 “불의를 봐도 외면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기계적이고 형식 논리만 따지는 경찰 수사로 상식은 사라졌다”는 등의 비판 댓글 1000여 건이 달렸다. 또 중랑경찰서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수십 건의 시민 항의 글이 올라오는 등 논란이 일었다.

 지난해 5월 프로농구 인천 전자랜드 소속 이현호(34) 선수는 서울 양천구의 한 놀이터에서 담배를 피우는 청소년 5명의 머리를 때리며 훈계했다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이씨는 즉결심판에서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또 지난해 11월 김모(37)씨는 광주시 남구의 도로변에서 청소년들에게 “길에 침 뱉지 말고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들어가라”고 훈계하며 머리를 때렸다. 경찰은 김씨를 폭행 혐의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다.

 중랑역 사건에 휘말린 중학교 교사 손성훈(34)·신성현(43)씨는 아직도 중랑경찰서에서 폭행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고 있다. 중랑서 관계자는 “경찰청의 지침을 적극 고려해 수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서준 기자